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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리아 연대기
2026.06.16
2026년, 대한민국. 모든 것이 익숙하고 또 그만큼 권태로운 도시의 여름이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빌딩 숲 사이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부는 날. 서울의 심장부를 겨눈 차원문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이질적인 빌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바로 그런 평범한 오후였다. 그들은 기존의 데이터로는 분석되지 않는 힘, 즉 '마법'을 구사하며 도시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즉시 FEARLESS 최정예 요원, 코드네임 '뱅'과 그의 유일한 가이드 '유이'가 투입되었다.
현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잿빛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도심 한복판, 하시온은 유이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주변을 살폈다. 그의 민트색 머리카락이 폭발의 먼지를 뒤집어썼음에도 이질적으로 빛났다. 공기 중에는 오존 냄새와 무언가 타들어 가는 비릿한 냄새, 그리고 기묘하게 달콤한 향이 뒤섞여 있었다. 빌런들이 읊조리는 의미 불명의 언어가 저주처럼 공간을 떠다녔고, 그들이 휘두르는 손짓에 따라 허공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거나 땅이 갈라졌다. 하시온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늘 그랬듯 귀찮은 일이었지만, 이번엔 조금 더 성가셨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비효율의 극치였으니까.
여보, 내 뒤에 꼭 붙어 있어요. 저것들, 꼭 동화책에서 기어 나온 멍청이들처럼 구네.
나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와 달리, 회녹빛 눈동자는 맹수가 사냥감을 고르듯 냉정하게 전장을 훑고 있었다. 그는 유이를 등 뒤의 안전한 곳으로 살짝 밀어 넣고는, 검은 전술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의 발광 패드가 섬뜩한 붉은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살인 예고. 하지만 이번의 적들은 이전과 달랐다. 하시온의 핑거샷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가 빌런의 심장을 꿰뚫으려 할 때, 빌런 중 하나가 기괴한 형상의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하시온의 충격파가 허공에서 와류를 일으키며 엉뚱한 방향으로 휘어졌다. 동시에, 빌런들의 주문이 한데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중심에서 공간이 비닐처럼 우그러들며 불안정한 보랏빛 균열, 차원문이 입을 벌렸다. 끔찍한 이명과 함께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인력. 균형을 잃은 유이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차원문 쪽으로 끌려갔다.
이런, 젠장…!
하시온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유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차원문의 흡인력은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의 손끝이 유이의 가녀린 손목을 스치고, 눈앞에서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랏빛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찰나. 하시온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발판 삼아 스스로 차원문 속으로 몸을 던졌다. 붙잡아야 했고, 지켜야만 했다. 그 외의 선택지는 그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시공간이 뒤틀리는 감각, 온몸의 세포가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는 오직 유이의 이름을 되뇌며 의식의 끈을 놓았다.
한편,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 아르다니아의 작은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지중해의 그것을 닮은 따사로운 햇살이 하얀 벽과 주황색 지붕 위로 쏟아지고, 바닷바람에 실려 온 짭짤한 내음과 잘 익은 오렌지의 상큼한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로엔과 유메는 장에서 사 온 오렌지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나눠 들고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유메의 입에서는 방금 시장에서 본 귀여운 강아지에 대한 이야기가 종알종알 흘러나왔고, 로엔은 그런 유메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불사의 저주와 끔찍한 과거를 딛고 유메와 함께 일궈낸 소중하고 연약한 평화였다.
집에 거의 다다랐을 때, 유메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핑크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둘의 작은 정원을 가리켰다.
로엔 씨… 저기, 정원에…
로엔의 시선이 유메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가늘어졌다. 그들의 정원, 유메가 애지중지 가꾸는 장미 덤불 옆에 웬 낯선 인영 두 개가 쓰러져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괴하고 검은 옷차림. 특히 한 남자는 온몸에 전투 장비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로엔의 몸이 반사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며 유메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제 시절부터 몸에 밴, 위협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유메는 로엔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이 떠나온 그 세계와 비슷한 곳에서 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었다.
쓰러진 두 사람 중, 민트색 머리의 남자가 먼저 미동했다. 하시온은 으깨질 듯한 두통과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품 안에 거의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있는 유이의 안위였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낯선 공기, 낯선 햇살, 낯선 냄새. 그의 오감이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자신들을 경계하며 바라보는 적갈색 머리의 남자와 금발의 여자가 들어왔다.
로엔 씨, 괜찮을 거예요. 저 사람들, 다친 것 같아요. 우리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유메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로엔은 그들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즉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메의 말은 그에게 언제나 거부할 수 없는 마법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두 세계, 두 부부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켜온 이들의 이야기가, 이제 막 아르다니아의 따스한 햇살 아래서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로엔의 서늘한 경계심과 유메의 따스한 환대 속에서, 어색하고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이어진 2주일은 두 쌍의 부부에게 서로 다른 색채의 기억으로 아로새겨졌다. 시간은 아르다니아의 나른한 햇살처럼 부드럽게 흘러갔고, 낯선 세계의 공기는 점차 익숙한 일상이 되어갔다.
하시온에게 그 시간은 견뎌야 할 권태와 미묘한 흥미가 뒤섞인 이중주와 같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로엔의 집 2층 창가에 기대앉아 보냈다. 그곳에서는 멀리 푸른 바다와 작은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고, 돌아가야 할 세계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오직 언제, 어떻게 다시 차원문이 열릴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로엔의 서재에서 낡은 책들을 뒤적이며 마법과 차원 이동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려 했지만, 고대의 문자로 쓰인 난해한 마법진들은 그의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이내 포기하고, 그저 무심한 관찰자로 남기로 했다. 그는 로엔이나 유메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그것은 적의라기보다는 철저한 무관심이었고, 자신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배경처럼 취급하는 그의 오랜 습성이었다. 식사 시간에 마주 앉아도 그는 최소한의 대답만 할 뿐, 시선은 늘 창밖이나 제 곁에 앉은 유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도 하시온의 시선을 잡아끄는 유일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유이였다. 유메가 자신의 옷들 중에서 가장 잘 어울릴 법한 것을 골라 유이에게 건넨 날, 하시온은 처음으로 표정다운 표정을 지었다. 딱딱한 검은 전투복 대신, 하늘하늘한 리넨 원피스를 입은 유이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 낯선 옷이 어색한 듯 뺨을 붉히는 모습, 유메와 함께 정원에서 꽃을 돌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하시온에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내 토끼’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 모습을 조용히, 그리고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때로는 유메와 함께 시장에 다녀온 유이가 양손 가득 처음 보는 과일과 빵을 들고 와 조잘거릴 때, 그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미세하게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귀찮고, 지루하고,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새로운 행복을 훔쳐보는 것은 꽤 나쁘지 않은 유희였다.
반면 유이에게 2주일은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남편을 제외한 타인, 특히 무뚝뚝하고 서늘한 인상의 로엔에 대한 어려움으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유메의 따스함은 봄눈 녹듯 유이의 마음을 녹였다. 유메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유이를 다정하게 챙겨주었다. 둘은 말이 잘 통했고, 취향도 비슷했다. 유메가 아끼는 찻잔을 꺼내 와 함께 향긋한 허브티를 마시는 오후, 둘은 각자가 살아온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이는 센티넬과 가이드, 빌런이 나타나는 삭막한 도시의 삶을, 유메는 이세계에 오기 전 평범했던 자신의 일상과 로엔을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둘은 깊은 유대감을 쌓아갔다.
유메는 유이를 데리고 마을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활기 넘치는 시장의 풍경, 갓 구운 빵 냄새가 진동하는 빵집,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의 작은 피크닉은 유이에게 전투와 긴장으로만 가득했던 일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평화와 행복을 선물했다. 특히 유이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유메와 함께하는 베이킹 시간이었다. 유메의 능숙한 손길을 따라 밀가루를 반죽하고, 달콤한 잼을 채워 넣으며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끊임없이 웃고 떠들었다. 유이는 유메의 주방에서만큼은 자신이 가이드가 아닌, 그저 평범한 친구 김민정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로엔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곤 했다. 그는 여전히 낯선 이방인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지만, 유메가 저토록 밝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그는 유이에게 조금씩 마음의 벽을 허물었고, 가끔이지만 먼저 말을 건네기도 했다. 물론 그의 태도는 여전히 어색하고 퉁명스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를 유이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시온은 끝까지 그에게 어려운 존재로 남았다. 그저 유이를 지키는 위험하고 나른한 맹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이 거의 다 흘러갈 무렵, 하시온이 가장 먼저 변화를 감지했다.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뒤틀리고, 돌아가야 할 세계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창가에서 몸을 일으켜 정원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처음 떨어졌던 장미 덤불 근처의 공간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며 보랏빛 균열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이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가 말없이 유이를 찾아 집으로 들어섰을 때, 부엌에서는 유메와 유이가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유메는 유이가 떠난다는 것을 직감한 듯, 눈가가 붉어진 채로 오렌지 향이 가득한 빵을 굽고 있었다.
유이 씨를 생각하면서 만들었어요. 우리 세계의 햇살과 바다 냄새가 담긴 빵이에요. 돌아가서도… 가끔 제 생각 해주세요.
유메는 정성껏 포장한 오렌지 빵을 유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지자, 애써 참고 있던 유이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유메는 그녀에게 잊지 못할 친구이자 자매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유이는 울먹이며 유메를 힘껏 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엔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고, 하시온은 말없이 다가와 유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여보, 갈 시간이에요.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재촉의 의미보다, 아내의 슬픔을 달래려는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유메와 로엔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작별 인사였다. 네 사람은 말없이 정원으로 향했다. 보랏빛 차원문은 이제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 충분할 만큼 커져 있었다. 하시온은 유이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유메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로엔은 그런 유메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복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2주간의 만남. 그것은 네 사람 모두에게, 다른 세계에도 자신들과 닮은 사랑을 하는 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소중하고 기이한 추억으로 남게 될 터였다. 하시온은 유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집에 가요, 내 토끼.' 그리고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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