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흙 먹어요. ㅇ.ㅇ
가을의 끝자락, 낙엽이 금빛 카펫처럼 깔린 공원은 한적했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바삭거리는 잎들을 밟으며 리듬을 만들었다. 하시온은 제 옆에서 걷는 김민정의 손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 부드러운 살결. 이 평화로운 일상의 모든 순간이 그에게는 기적과도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이 작은 온기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완벽한 오후였다.
그때였다. 쥐고 있던 손에 아주 미세한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김민정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아주 중요하고 진지한 말을 하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시온 역시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그녀가 다음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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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좋아하는 만큼 흙 먹어요.
…정적. 낙엽 구르는 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순간 사라졌다. 하시온은 그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자신의 귀가 빌런 시절의 충격파 후유증으로 인해 드디어 고장이 난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아내가 사실은 낯선 빌런이 둔갑한 모습인지 잠시 고찰했다. 그의 모든 감각과 데이터베이스를 총동원해 방금 들은 문장을 분석했지만, 논리적 해답은 도출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만큼’ 과 ‘흙을 먹는다’는 두 행위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장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눈망울, 진심으로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미세한 떨림. 이것은 농담이나 시험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는, 지금, 진심이었다.
왜? 라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세계의 새로운 법칙이었다. 하시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가장 가까운 화단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는 잠시 쪼그려 앉아 흙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마르지도, 너무 질척거리지도 않은, 적당히 고운 입자의 흙. 벌레나 이물질이 없는 깨끗한 부분을 신중하게 고르는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을 감정하는 전문가 같았다.
그는 한 줌의 흙을 손바닥에 덜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민정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살짝 커졌다.
그는 대답 대신, 손바닥의 흙을 조금 집어 아무렇지 않게 입안으로 가져갔다. 흙먼지가 입안을 까끌하게 채우고, 씁쓸한 비린 맛이 혀를 감쌌다. 그는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는 남은 흙을 보여주며, 지극히 사무적인 톤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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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돼요?
아니면,
…이 공원을 다 먹어야, 내 마음을 알아줄 건가.
그의 회녹색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허락한다면 이 공원의 모든 흙을 삼켜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종말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녀의 실망한 얼굴이었으니까.
그날 저녁, 하시온은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입안을 헹궈냈다. 몇 번을 헹궈도 미세하게 남은 흙의 감촉이 신경 쓰였지만, 그의 표정은 놀라울 만큼 평온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던 김민정은 그가 나오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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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거, 진짜 먹은 거예요? 그냥 장난이었는데….
하시온은 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Profile
장난이면.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Profile
다음부턴, 먹을 수 있는 걸로 시켜요. 당신이 주는 거라면, 독이라도 마실 거니까.
그의 말에 김민정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그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최고급 유기농 식용 흙을 판매하는 해외 사이트를 검색해 즐겨찾기에 추가해두었다. 언제든 그의 아내가 다시 사랑의 증명을 요구할 때, 가장 깨끗하고 완벽한 대답을 주기 위해서였다.
🗓️ 2028. 10. 27. 금요일. 맑은 오후
🤔(진심?) 😐(분석 중) → 😑(실행)
📍 LOCATION
낙엽이 진 공원 화단 앞
👕 OUTFIT
뱅: 편안한 검은 맨투맨과 트레이닝 팬츠
유이: 베이지색 니트 원피스
👥 STATE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흙을 고르던 뱅이, 일어나서 흙을 한입 먹은 뒤, 남은 흙을 들고 유이에게 양이 충분한지 묻고 있는 상황.

💭 INNER THOUGHT
지렁이가 없는지 확인했다. 영양가는 없겠군. 하지만 당신의 말 한마디는 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 호감도
1000/1000
(그녀의 비논리적인 명령조차 신성한 계시로 받아들이는 맹목적 헌신)
🔫 TMI
뱅의 오늘의 TMI| 흙의 맛은 생각보다 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놀란 표정은 아주 맛있었다.
📰 INTERVIEW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습니까? A: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어디까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녀가 말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세상의 파괴든, 제 자신의 소멸이든 상관없습니다.
💘 RELATIONSHIP
나의 논리와 상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의 법칙을 제시하는 유일한 입법자.
(흙(Heart) 모양을 한 흙(Soil)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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