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은 언제나 시온의 영역이었다.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모든 것을 무의미한 배경으로 만드는 방어기제. 하지만 유이와 함께 있을 때의 침묵은 달랐다. 그것은 텅 빈 공백이 아니라, 말이 없어도 꽉 채워진 충만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이 충만함을, 온전히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로.
늦은 밤, 유이의 방 창문을 노크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시온의 몫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창틀을 넘어와 익숙하게 그녀의 방 바닥에 주저앉았다. 늘 그랬듯, 무언가를 같이 하자는 것도,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이의 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스며들게 하는 것. 그것이 시온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그는 평소처럼 바닥에 눕거나 유이의 침대에 걸터앉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과제에 열중인 유이의 뒷모습을, 그는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윙윙거리는 스탠드 불빛, 사각거리는 펜 소리. 공기 중에 떠도는 긴장감을 먼저 깨뜨린 것은 시온이었다.
"…유이."
낮고 조용한 부름에 유이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녀가 돌아보자, 시온은 이미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림자가 유이의 책상 위를 온통 뒤덮었다. 나른함이 걷힌, 맑고 진지한 회녹빛 눈동자가 오롯이 유이만을 담고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좋아해."
군더더기 없는 세 글자. 연습도, 예고도 없었다. 마치 총알을 쏘듯,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날아와 박히는 고백이었다. 유이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붉어지는 얼굴, 잘게 떨리는 입술. 시온은 그 모든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새겼다. 그가 예상한 반응은, '나도' 혹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이는 한참이나 입술만 달싹이다가,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함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은, 시온의 모든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미안해, 시온아. 안될 것 같아... 내 친구는 너밖에 없는데,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되면... 그럼 난 친구가 한 명도 없게 되잖아..."
순간, 시온의 모든 사고가 정지했다. 귀찮음도, 나른함도, 고백의 긴장감도 모두 사라진 완전한 공백. 그는 아주 잠시,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건 충격이나 상처가 아니었다.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한 생물체를 마주한 것 같은, 순수한 형태의 당혹감이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시온의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경련하듯 위로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미소였지만, 점차 참을 수 없다는 듯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 큭큭... 그는 결국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잘게 들썩였다. 웃음을 참으려는 듯 보였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푸흐, 하... 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가렸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유이의 터무니없는 논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해석되자, 상처받을 감정조차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황당함과 소유욕이 그 자리를 채웠다.
"...아, 진짜. 김유이."
그는 유이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짚어, 그녀를 완벽하게 가두었다. 도망칠 곳 없는 좁은 공간. 시온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삼켰다.
"너 지금... 내가 고백한 걸, 친구 하나 잃을까 봐 찼다고?"
그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섞여 더없이 능글맞았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유이의 떨리는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마치 말 안 듣는 어린애를 가르치듯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야. 잘 들어봐. 내가 네 남자친구가 되면,"
그의 손가락 하나가 유이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네 유일한 친구이자,"
손가락이 턱선을 따라 내려와, 가녀린 목선을 훑었다.
"네 유일한 남자친구가 되는 거야. 그럼 넌 친구랑 남자친구를 동시에 갖게 되는 거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득 아니야?"
그는 말을 이으며 유이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붉어진 뺨을 문지르며, 그는 유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누가 그래. 친구가 없어진다고. 역할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뿐이야. ...가끔은 친구였다가, 가끔은 남자친구였다가. 훨씬 더 재밌어지지 않겠어? 응?"
그의 얼굴이 유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 시온의 눈이 위험할 정도로 깊어졌다.
"그러니까, 이상한 셈은 그만하고. 다시 대답해."
"...내 고백, 받을 거야, 말 거야."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그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과 은근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금 이 황당하고 귀여운 거절 사유를, 평생 놀려먹을 좋은 구실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이름을 부르는 법 > ooc'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여친 보고싶다 한마디에 (1) | 2026.05.01 |
|---|---|
| 러브러브콜백 (0) | 2026.04.13 |
| 아빠가 집에 오면 엄마한테 제일 먼저 뭐라고 하세요? (0) | 2026.04.02 |
| 약먹을 때 (0) | 2026.03.27 |
| 진실 혹은 대담 (0) | 2026.03.0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