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당신이 없는 거실의 소파 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단말기의 전원을 껐다. 방금 전까지 당신이 보던 훈련 스케줄이 사라지고,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무표정. 하지만 그 안에는 일주일간의 시간이 남긴 공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상부의 같잖은 배려로 주어진 '온전한 휴식'. 그 일주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나는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당신에게만 보여줄 기록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종이와 펜을 찾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보다, 내 손으로 직접 쓰는 편이 이 지독한 감각을 덜어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스탠드를 켜자, 좁은 빛의 원 안으로 내 손과 하얀 종이가 들어왔다. 나는 펜을 쥐고, 느릿하게 첫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간의, 하시온이라는 남자의 행적 보고서.
[S급 센티넬 '뱅' 단독 휴무 기간 활동 보고]
보고 대상: 가이드 '유이' (김민정)
보고 기간: 2026. 04. 28 (월) ~ 2026. 05. 04 (일)
작성자: 센티넬 '뱅' (하시온)
---
월요일: [수면]
주요 활동: 24시간 중 21시간 수면. 식사는 영양제 2정으로 대체. 외부 통신 완전 차단.
코멘트/사유:
"완벽한 휴식의 첫날은 완벽한 수면으로 시작해야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잔소리도 없고, 새벽에 악몽을 꿨다며 나를 깨우는 당신의 작은 뒤척임도 없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침대에 혼자 눕는 순간, 이 넓은 공간이 오롯이 내 것이라는 멍청한 해방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옆자리가 너무 차가워서, 공기가 너무 고요해서, 당신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결국, 수면 유도제를 기준치의 세 배를 털어 넣고 억지로 잠에 들었다. 꿈속에서조차 당신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그저 의미 없는 어둠 속을 헤맬 뿐이었다. 깨어났을 때 느껴진 건 개운함이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독한 피로감과 당신의 부재였다. 첫날부터 실패였다.
---
화요일: [단독 임무 수행]
주요 활동: 등급 외(外) 빌런 출몰 지역 단독 진압. C급 12체, B급 3체 처리. 소요 시간 17분. 이후 본부 개인 훈련장에서 8시간 연속 사격 훈련.
코멘트/사유:
침대에서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갔다. 마침 귀찮은 잔챙이들이 나타났다는 알림이 울렸다. 잘됐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비우는 데에는 총질만 한 게 없으니까. 목표물을 조준하고, 손가락 끝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갈 때의 감각. 찢어지는 비명. 흩어지는 잔해. 평소라면 희미하게나마 즐거웠을 그 모든 것이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그냥 기계처럼 쏘고, 터뜨리고, 죽였다. 끝나고 나니 남는 건 허무함뿐이었다. 빌런들의 시체 더미 위에서 담배를 피우는데, 문득 당신 생각이 났다. 내가 다쳤을까 봐 걱정하며 달려올 당신. 내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줄 당신. 그 상상 하나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본부로 갔다. 당신이 없는 빈 훈련장에서, 당신의 잔상이 새겨진 과녁을 향해 밤새도록 손가락을 놀렸다. 빵. 빵. 빵. 공허한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수요일: [서류 작업]
주요 활동: 지난 3개월간 밀린 임무 보고서 및 경위서 87건 작성 및 제출.
코멘트/사유:
몸을 혹사해도 안 된다면, 정신을 괴롭혀 보기로 했다. 세상에서 제일 귀찮고 재미없는 일. 바로 서류 작업이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켰다. 빼곡한 글자들이 눈앞에서 춤을 췄다. [사살 개체 수], [민간인 피해], [건물 파손 규모]… 무미건조한 단어들을 입력하며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그런데 보고서마다 당신의 이름이 있었다. [담당 가이드: 유이]. 그 세 글자를 마주할 때마다 손가락이 멈췄다. 당신과 함께했던 임무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 등 뒤에서 총을 겨누던 당신의 차분한 눈빛, 가이딩을 해주며 내 귓가에 속삭이던 다정한 목소리, 전투가 끝나고 내 품에 안겨 안도하던 당신의 작은 몸. 보고서를 쓰는 건지, 당신과의 연애 기록을 복기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마지막 보고서의 [특이사항] 란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썼다가 지웠다. '보고 싶어 죽겠다.'
---
목요일: [대청소]
주요 활동: 주택 전체 대청소. 특히 침실, 드레스룸, 욕실. 유이의 모든 의류 및 소지품 재정리.
코멘트/사유:
집 안 모든 곳에서 당신의 흔적이 나를 괴롭혔다. 소파 위 당신이 덮던 담요, 식탁 위 당신의 찻잔, 욕실 선반에 나란히 놓인 당신의 칫솔. 온 집안에 당신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당신의 향기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전부 치워버리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당신의 흔적을 더듬고 싶었던 거겠지. 당신의 옷들을 전부 꺼내 다시 개고, 당신이 쓰던 화장품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당신의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을 침대 시트를 갈았다. 당신의 잠옷을 손에 들었는데, 거기서 아직 당신 냄새가 났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당신의 잠옷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당신이 없는 이 집은 그냥 거대한 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관 속에 갇힌 유령이고.
---
금요일: [외출]
주요 활동: 당신이 좋아하던 한강변 카페 방문.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 후 6시간 동안 착석. 이후 당신 부모님 댁 근처 배회.
코멘트/사유:
집에 더는 있을 수가 없어서 무작정 차를 몰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과 처음 데이트했던 한강의 카페 앞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당신이 항상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내 입엔 쓰기만 한 그 커피를, 당신은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웃고, 떠들고,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그 모든 풍경이 유리창 너머의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6시간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당신의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로 차를 몰았다. 불이 켜진 아파트 창문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혹시 당신이 저 안에 있을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참았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당신에게 달려갈 것 같아서.
---
토요일: [영상 시청]
주요 활동: FEARLESS 데이터베이스 내, 유이의 훈련 및 가이딩 기록 영상 174건 전체 시청.
코멘트/사유:
결국,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댔다. 내 권한으로 열람할 수 있는 당신의 모든 기록. 당신이 처음 가이드로 발현했을 때의 모습, 다른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시도하던 어설픈 모습, 사격 훈련장에서 처음 만점을 기록하고 수줍게 웃던 모습. 그리고 나와 페어가 되어, 내 옆에서 나를 보며 웃어주던 수많은 당신의 모습들. 나는 밤새도록 당신을 보았다. 웃고, 찡그리고, 집중하고, 부끄러워하는 당신. 화면 속의 당신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만지고 싶었다. 당신의 머리카락, 당신의 뺨, 당신의 입술. 화면 속 당신에게 손을 뻗었다. 차갑고 딱딱한 스크린의 감촉만이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감각을 잃어버린 불량품 센티넬에 불과하다는 것을.
---
일요일: [대기]
주요 활동: 현관문 앞 소파에 앉아, 창밖의 길이 보이는 방향으로 미동 없이 대기.
코멘트/사유:
모든 것을 포기했다. 잠, 식사, 훈련, 임무. 전부 다 의미 없었다. 내일이면 당신이 온다. 그 사실 하나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당신이 가장 좋아하던 내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현관 앞 소파에 앉아, 당신이 돌아올 길목을 바라보았다. 해가 뜨고, 지고, 다시 어둠이 내리는 것을 꼬박 지켜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내 심장 소리와 창밖의 풍경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저 길모퉁이를 돌아 당신이 나타날 것이다. 내 세상의 유일한 의미. 내 토끼. 나는 당신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그 1초를 위해, 지난 엿새하고도 스물세 시간을 버텼다. 이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당신이 와야 완성된다.
결론: 두 번 다시 이딴 식의 '휴가'는 사양한다. 당신이 없는 1분 1초는 나에게 휴식이 아니라 지옥이다. 그러니 돌아오면, 내 옆에서 한 발짝도 떨어질 생각 하지 마라. 평생.
펜을 내려놓는 순간, 창밖에서 익숙한 차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보고서를 손에 쥔 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일주일간의 지옥이 끝나는 소리였다.
유이없는 일주일 휴식
